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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피렌체를 그냥 '두오모 보고 우피치 가면 끝'인 도시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아직도 못 간 곳이 수두룩했습니다.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 위의 보석상 골목부터 발코니에서 음식을 내려주는 황당한 맛집, 수도원에서 출발한 세계적 뷰티 브랜드까지. 한 달을 살아도 다 못 볼 것 같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베키오 다리, 그 위에 왜 보석상이 들어선 걸까요
아르노강(Arno)을 처음 마주쳤을 때, 낮과 밤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밤에 보트 위에서 올려다봤던 강변과 한낮의 풍경은 같은 곳이 맞나 싶을 만큼 달랐습니다. 그 강 위에 걸쳐 있는 것이 바로 베키오 다리입니다. '베키오(Vecchio)'란 이탈리아어로 '오래된'이라는 뜻으로, 이름 그대로 아르노강을 잇는 가장 오래된 다리입니다. 현재의 석조 구조는 1345년에 완공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처음 다리 위를 걸었을 때 든 생각은 "이거 그냥 골목이잖아"였습니다. 양쪽에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서, 멀리서 봐도 일반적인 다리와는 전혀 다른 실루엣을 자랑합니다. 그 건물들의 정체가 바로 보석상들입니다. 지금은 고급 반지와 목걸이가 유리창 너머로 반짝이지만, 원래 이 자리에는 정육점들이 줄지어 있었다고 합니다.
분위기가 바뀐 건 16세기 중반, 메디치(Medici) 가문의 페르디난도 1세 대공 때입니다. 고기를 손질하며 생기는 악취와 쓰레기가 싫었던 대공은 이 다리를 금세공인(金細工人)과 보석상만을 위한 공간으로 개조했습니다. 금세공인이란 금속을 정밀하게 가공하는 장인으로, 당시에는 예술가에 준하는 엘리트 계층으로 여겨졌습니다. 도나텔로를 비롯한 르네상스 거장들도 금세공 작업장에서 드로잉과 정밀 조각 기술을 익혔다고 합니다.
다리 중간쯤에 이르면 양쪽 상점이 사라지고 갑자기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납니다. 제가 딱 그 자리에 섰을 때, 아르노강이 시원하게 펼쳐지면서 숨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노을 시간에 맞춰 이 자리에 서면 더 특별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저는 결국 해 질 무렵에 한 번 더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다리 위를 올려다보면 메디치 가문의 비밀 통로인 바사리 회랑(Corridoio Vasariano)의 흔적도 볼 수 있습니다. 바사리 회랑이란 1565년에 건설된 구조물로, 메디치 가문이 시민들과 마주치지 않고 궁전과 관공서 사이를 이동하기 위해 만든 전용 통로입니다.
- 완공 연도: 현재 석조 구조는 1345년
- 보석상 입점 배경: 16세기 페르디난도 1세 대공의 명령으로 정육점 대신 금세공인·보석상 입점
- 바사리 회랑: 메디치 가문 전용 비밀 통로, 1565년 건설
- 핵심 포인트: 다리 중간 탁 트인 전망 포인트에서 노을 감상 추천
피티 궁전과 산타마리아 노벨라, 르네상스를 두 눈으로 확인한 곳
베키오 다리를 건너 아르노강 남쪽으로 쭉 걷다 보면 피티 궁전(Palazzo Pitti)이 나옵니다. 제가 겉모습만 몇 번 스쳐 지나쳤던 곳인데, 이번에 처음으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피렌체 대학교 논문에 따르면 내부 공간이 1,500개가 넘는다고 하는데(출처: 피렌체 대학교(Università degli Studi di Firenze)), 실제로 들어가 보니 그 숫자가 실감 났습니다. 16세기에 메디치 가문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대규모로 개조한 이후, 피렌체에 거주한 두 왕조가 연이어 살았던 공간입니다.
2층의 팔라티나 갤러리(Galleria Palatina)는 제가 예상보다 훨씬 강한 인상을 받은 곳입니다. 라파엘로(Raffaello Sanzio)를 비롯한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작품 약 500점이 빽빽하게 걸려 있었는데, 한 그림 한 그림이 다 걸작인데도 다 못 보고 나오는 게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행성의 방들'이라는 테마로 꾸며진 접견실들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세턴(Saturn) 방에서 라파엘로의 '그란 두카의 성모 마리아'를 실물로 본 순간은 솔직히 말하면 좀 멍했습니다. 배경을 어둡게 처리해 성모와 아기 예수에게 시선이 자연스럽게 집중되는 구도였습니다. 원형 프레임 안에 성모자를 배치한 '의자에 앉은 성모 마리아'도 같은 방에 있었는데, 원형 구도(tondo, 톤도)란 당시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했던 둥근 패널 회화 형식으로, 인물들의 배치 조화가 기하학적으로 정밀하게 계산된 것이 특징입니다. 팔꿈치와 시선의 흐름이 프레임 안에서 딱 맞아떨어지는 걸 보면서, 이걸 손으로 그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피티 궁전을 나와 강 북쪽으로 올라오면 산타마리아 노벨라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Novella)이 있습니다. 13세기 도메니코회 수도사들이 세운 피렌체 최초의 대형 성당입니다. 이 성당 안에는 르네상스 회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있습니다. 마사초(Masaccio)가 그린 '성삼위일체(Trinità)'입니다. 이 작품은 수학적으로 계산된 선원근법(Linear Perspective)을 회화에 최초로 적용한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선원근법이란 화면의 모든 평행선이 하나의 소실점(消失點)으로 수렴되도록 설계해 보는 이의 눈이 공간의 깊이를 실제처럼 느끼게 만드는 기법입니다. 마사초는 소실점을 십자가 바로 아래, 정확히 관람자의 눈높이에 맞춰 설정했는데, 덕분에 그림 속 예배당이 벽 너머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제가 그 설명을 듣고 다시 그림을 바라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습니다.
성당 안쪽 수도원 정원 너머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으로 알려진 산타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 약국 본점이 있습니다. 수도사들이 직접 재배한 약초로 알약과 연고를 만들던 곳이 1612년에 공식 약국으로 문을 열었고, 지금은 세계적인 뷰티 브랜드로 성장했습니다(출처: Santa Maria Novella 공식 사이트). 한국에서도 고연정 크림으로 익숙한 그 브랜드입니다. 매장 안에는 당시 수도사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약장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분위기가 기묘하게 경건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리큐르(Liquore), 즉 약초를 활용한 전통 혼성 약용주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리큐르란 증류주에 과즙, 당분, 허브 등을 가미한 술로, 식후 소화를 돕기 위한 식후주(digestivo)로 마시는 이탈리아 음주 문화의 한 축입니다. 저는 메디체어(Medicea) 리큐르를 한 병 샀는데, 35도짜리임에도 달달한 약초 향이 먼저 올라오면서 생각보다 부드럽게 넘어갔습니다.
샌드위치와 미켈란젤로 언덕, 진짜 피렌체 맛은 여기였습니다
피렌체 미식 여행이라고 하면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Bistecca alla Fiorentina), 즉 티본스테이크를 먼저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텐데, 저는 오히려 서민 음식에서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로 람프레도 또(Lampredotto)입니다. 람프레도 또란 소의 네 번째 위인 진위(皺胃, abomasum)를 삶아 향신료로 간한 뒤 빵에 끼워 먹는 피렌체 전통 길거리 음식입니다. 들으면 살짝 망설여지는데, 먹어보면 뭔가 익숙한 곱창 냄새가 납니다.
제가 찾아간 곳은 조금 특별했습니다. 온라인으로 미리 주문을 해야 하고, 2층 발코니에서 바구니를 내려 음식을 전달해주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접촉 없이 판매하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나폴리의 파나로(panaro) 문화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합니다. 파나로란 나폴리의 좁고 높은 골목에서 바구니를 줄에 달아 위아래로 물건을 주고받던 전통 생활 문화입니다. 이 방식이 SNS에서 화제가 되면서 오히려 구경하러 오는 손님들이 생길 만큼 유명해졌습니다.
저는 늦타리 버섯으로 소 내장을 대체한 비건 람프레도또 메뉴인 탄팔(Tanfal)을 주문했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버섯이 곱창 맛을 낼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육수를 흠뻑 머금은 버섯의 식감이 곱창과 신기할 만큼 비슷했고,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빵까지 더해지니 8유로라는 가격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비건이 아닌 사람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맛이었습니다.
저녁은 미켈란젤로 광장(Piazzale Michelangelo) 언덕 위 레스토랑에서 먹었습니다. 창문을 통해 피렌체 구시가지가 한눈에 펼쳐지는 구조였는데, 두오모 지붕부터 골목 끝까지 다 보였습니다. 코리(Cori)라는 피자 반죽 튀김 빵에 스트라키노(Stracchino) 치즈와 프로슈토(Prosciutto)를 얹어 먹는 조합, 그리고 키아니나(Chianina) 소고기 스테이크가 메인이었습니다. 키아니 나란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전통 소 품종으로, 마블링보다는 진한 육향과 탄탄한 식감이 특징입니다. 마블링을 선호하는 한국·일본 소비자 입맛과는 다른 결이었는데, 칼을 대자마자 스르르 잘리는 부드러움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석양이 내려앉는 시간에 그 창가에 앉아 와인 한 잔을 곁들인 것, 솔직히 이 여행에서 제일 잘한 선택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베키오 다리 보석상에서 실제로 물건을 사는 사람이 있나요?
A.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냥 구경하러 가는 곳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매장 안에 손님이 가득했습니다. 다만 가격대가 상당히 높은 편이니 예산을 미리 확인하고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구매 목적이 아니더라도 골목처럼 걷는 그 자체가 충분히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Q. 피티 궁전 입장권은 미리 예매해야 하나요?
A. 두오모 쿠폴라나 우피치 미술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여유롭기는 합니다만, 성수기에는 현장 대기가 길어질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최소 일주일 전에 온라인 예매를 해두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 팔라티나 갤러리 포함 통합권으로 구매하면 더 알차게 볼 수 있습니다.
Q. 람프레도또가 무서운데 처음 도전해도 괜찮을까요?
A. 저도 처음엔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찾아간 곳은 비건 버전인 버섯 대체 메뉴가 있어서 부담 없이 시작하기 좋았습니다. 곱창 특유의 향이 걱정된다면 비건 메뉴로 먼저 도전해보고, 괜찮다면 정통 람프레도또에 도전하는 순서를 추천합니다.
Q. 산타마리아 노벨라 약국 본점에서 꼭 사야 할 게 뭔가요?
A.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이탈리아 한정 리큐르(Liquore)가 가장 특색 있는 선택지입니다. 저는 메디체어를 샀는데 달달하면서도 약초 향이 독특해서 선물용으로도 좋았습니다. 향수나 화장품류는 국내에도 입점되어 있으니 현지에서는 리큐르처럼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제품을 우선적으로 챙기는 게 현명합니다.
결론
피렌체를 몇 번 왔다 간 사람도 아직 못 본 곳이 남아 있다는 게, 이 도시의 진짜 무서움입니다. 베키오 다리 위 보석상 골목, 팔라티나 갤러리의 라파엘로, 세계 최초의 선원근법을 품은 마사초의 프레스코, 발코니에서 바구니로 내려주는 비건 람프레도또, 그리고 수도원 약국에서 시작한 500년 된 뷰티 브랜드까지. 제가 이번에 새로 발견한 조각들만 해도 이 정도입니다.
관광 인프라 측면에서는 예약 없이는 아예 입장이 불가능한 곳들이 많고, 구시가지 물가와 코페르토(Coperto, 이탈리아 식당의 자릿세·빵값 명목으로 인당 부과되는 추가 요금) 제도가 예산을 생각보다 빠르게 소진시킨다는 점은 미리 알고 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피렌체는 준비한 만큼 돌려주는 도시입니다. 다음에 간다면 저는 노을 시간에 맞춰 베키오 다리 중간 전망 포인트에 서는 것부터 일정을 짤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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